10월이 되면 회사마다 같은 일이 시작된다. 내년 사업계획 수립.
부서마다 수십 장짜리 계획서가 올라온다. 올해 한 일, 내년 할 일, 조직도, 일정표, 예산표. 공들인 흔적이 보인다. 그런데 결재하는 쪽에서 실제로 꼼꼼히 읽는 건 생각보다 적다.
결재자는 첫 페이지에서 판단하고, 나머지 장은 그 판단을 확인하는 데 쓴다.
첫 장을 읽고 “이 팀은 내년에 뭘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느끼면, 뒤의 39장은 그 느낌을 확인하는 자료가 된다. 반대로 첫 장이 선명하면, 뒤의 자료는 근거로 읽힌다.
이 글은 사업계획서를 검토하는 자리에서 보는 첫 페이지의 5가지, 그리고 반려되는 계획서의 5가지 유형을 정리한다. 마지막에 바로 쓸 수 있는 1페이지 양식도 붙였다.
먼저, 반려되는 사업계획서의 5가지 유형
좋은 계획서의 조건을 말하기 전에, 결재선에서 반복해서 돌아오는 계획서부터 보자. 대부분 이 다섯 가지 중 하나다.
| 유형 | 특징 | 결재자의 반응 |
|---|---|---|
| ① 올해 한 일 나열형 | 첫 장부터 올해 실적과 활동 목록 | “그래서 내년엔?” |
| ② 희망 목표형 | “매출 20% 성장”, 근거 없는 큰 숫자 | “이 숫자는 어디서 나왔지?” |
| ③ 과제 백화점형 | 과제 20~30개, 우선순위 없음 | “다 하겠다는 건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것” |
| ④ 예산 먼저형 | 목표보다 필요한 돈과 인력이 먼저 나옴 | “무엇을 위해서?” |
| ⑤ 트렌드 복붙형 | AI, ESG, 고객경험… 유행어가 과제 이름 | “우리 팀 문제와 무슨 상관이지?” |

다섯 유형의 공통점은 하나다. 목표와 과제와 자원이 하나의 줄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각각은 그럴듯한데, 이어서 읽으면 논리가 끊긴다.
특히 ⑤번은 요즘 가장 많이 늘었다. 트렌드를 참고하는 건 좋다. 내년 사업계획 전에 트렌드 책을 읽어보라고 이전 글에서 권한 이유도 그거다. 하지만 트렌드는 우리 문제를 푸는 도구로 들어가야지, 과제 이름이 되면 안 된다. “AI 도입”은 과제가 아니다. “월말 정산 5일을 3일로 줄이기 위해 데이터 취합 단계를 자동화”가 과제다.
시작 전에 —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는가
5가지를 보기 전에, 결재자가 첫 장에서 실제로 하는 일이 하나 있다. 이 팀이 내년에 무엇을 밀고 무엇을 포기하겠다는 건지, 자기 말로 한 줄로 정리해 보는 것이다.
정리가 되면 나머지 장은 확인 작업이 된다. 정리가 안 되면, 그 자체가 반려 신호다.
그래서 첫 장 맨 위에는 이 한 줄을 직접 써 두는 게 좋다.
“내년엔 [무엇을] [기준선]에서 [목표치]로 만들기 위해 [A·B·C]를 하고, [D]는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내년엔 월 마감을 7일에서 5일로 줄이기 위해 데이터 취합 자동화·검증 단계 통합·마감 일정 재설계를 하고, 신규 보고서 개발은 하지 않는다.” (예시)
이 문장을 못 쓰겠다면, 계획서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이다. 작성하는 쪽에게는 스스로 거르는 필터가 되고, 결재하는 쪽에게는 “이 팀은 자기 계획을 자기 말로 설명할 수 있구나”라는 신뢰가 된다.
특히 마지막 “하지 않는다”가 중요하다. 할 일 목록은 누구나 쓴다. 안 할 일을 쓰는 팀은 드물다. 그리고 결재자가 진짜 보고 싶은 건 그쪽이다.
결재자가 첫 페이지에서 보는 5가지
한 줄 요약을 받쳐 주는 게 아래 다섯 가지다. 좋은 사업계획서의 첫 장은 이 질문에 순서대로 답한다.

1. 올해 진단 — 계획 대비 무엇이 됐고, 왜 안 됐나
사업계획은 내년 이야기지만, 결재자가 가장 먼저 확인하는 건 올해에 대한 판단력이다. 올해를 정확히 보지 못하는 팀이 내년을 정확히 계획할 리 없기 때문이다.
나쁜 진단은 활동을 나열한다. “○○ 프로젝트 완료, ○○ 시스템 도입, 교육 ○회 실시.” 좋은 진단은 계획 대비 결과와 그 이유를 말한다.
| 나쁜 진단 | 좋은 진단 |
|---|---|
| 원가 절감 활동 12건 추진 | 원가 목표 대비 92% 달성. 단가 협상은 목표 초과, 물량 증가분 미반영으로 총액은 미달 |
| 고객 만족도 개선 활동 강화 | 만족도 목표 85점 대비 81점. 응대 속도는 개선, 재문의율은 악화 |
(예시 숫자)
진단 끝에 한 줄을 더 붙이면 좋다. “올해 배운 것 → 내년 계획에 반영한 것.” 예를 들면 “물량 변동을 연초에 반영하지 못해 총액이 미달했다 → 내년엔 분기마다 물량 기준을 재조정한다.” 실적만 나열한 진단보다 판단력이 자랐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서 기준은 예산 2편에서 말한 것과 같다. 올해 계획이 아니라 올해 실적(전망)이 출발점이다. 10월에 쓰면 실적이 확정되지 않았으니 “1~9월 실적 + 10~12월 전망”으로 쓴다.
2. 내년 목표 — 1~3개, 숫자와 기한으로
두 번째로 보는 건 목표다. 결재자는 목표가 몇 개인지부터 본다.
목표가 10개면, 실제로는 목표가 없는 것이다. 팀의 시간과 돈은 정해져 있고, 10개를 동시에 밀면 어느 것도 끝까지 가지 못한다. 첫 페이지의 목표는 1~3개가 적당하다.
그리고 목표는 반드시 이 형태여야 한다.
[무엇을] [기준선]에서 [목표치]로, [언제까지]
- ✕ “운영 효율화”
- ✕ “고객 만족 극대화”
- ○ “월 마감 소요 7일 → 5일, 내년 6월까지”
- ○ “재문의율 18% → 10%, 내년 말까지”
(예시)
기준선이 없는 목표는 달성했는지 확인할 수 없다. 기한이 없는 목표는 영원히 진행 중이다. 목표를 숫자로 쓰기 어렵다면 관리 업무 성과를 4개 층으로 나누는 법을 참고하면 된다. 품질, 마일스톤, 예방, 개선 중 하나에는 반드시 숫자가 나온다.
3. 목표와 과제의 연결 — 과제가 목표를 얼마나 만드나
계획서에서 가장 자주 끊기는 곳이 여기다. 목표는 “원가 5% 절감”인데, 과제는 “협력사 관리 강화, 프로세스 개선, 시스템 고도화”다. 그 과제들이 5% 중 몇 %를 만드는지가 없다.
결재자는 목표와 과제 사이에 이런 연결을 찾는다.

| 목표: 원가 5% 절감 | 기여 | 통제 가능성 | 근거 |
|---|---|---|---|
| 과제 A. 주요 품목 재입찰 | 2.5% | 중간 | 시장 단가에 영향받음 |
| 과제 B. 발주 단위 통합 | 1.5% | 높음 | 내부 프로세스만 바꾸면 됨 |
| 과제 C. 반품·폐기 감축 | 1.0% | 높음 | 현장 기준 변경으로 가능 |
| 합계 | 5.0% |
(예시 숫자)
이 표 하나가 있으면 대화가 달라진다. 결재자가 “과제 B는 내년에 어렵지 않나?”라고 물으면, “그러면 목표는 3.5%가 됩니다”라고 바로 답할 수 있다. 목표와 과제가 연결된 계획서만 조정이 가능하다. 연결이 없는 계획서는 통째로 깎이거나 통째로 통과한다.
여기에 통제 가능성 열을 하나 더 붙이면 계획서가 훨씬 정직해진다. 우리 힘으로 바로 손댈 수 있는 과제는 ‘높음’, 물량·단가·정책 같은 외부 변수에 걸린 과제는 ‘낮음’ 또는 ‘중간’. 결재자는 이 열을 보고 “이건 우리가 하는 일이냐, 운에 맡기는 일이냐”를 바로 판단한다. 통제 가능성이 낮은 과제에 목표의 대부분이 걸려 있다면, 그 계획은 사실상 희망이다.
과제는 3개 안팎이 좋다. 나머지는 “기타 운영 과제”로 묶어 뒷장에 둔다.
4. 자원 요청 — 목표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네 번째가 돈과 사람이다. 순서가 중요하다. 목표 → 과제 → 자원. 이 순서가 뒤집히면 ④번 ‘예산 먼저형’이 된다.
자원 요청은 예산 품의 시리즈에서 다룬 원칙이 그대로 적용된다.
- 과제마다 필요한 자원을 붙인다 (과제 A에 외부 컨설팅 ○○원, 과제 B에 인력 0.5명)
- 증감은 올해 실적 기준으로 쓴다
- 전사 예산은 한정돼 있으니, 우선순위를 스스로 매겨 둔다. “예산이 70%만 승인되면 과제 C를 내후년으로 미루겠습니다”
자원 요청은 표 하나로 정리하면 더 선명하다. 핵심은 마지막 열, 이 자원을 쓰면 무엇을 줄이거나 멈추는지다.
| 우선순위 | 과제 | 필요 자원 | 대신 축소·중단하는 것 |
|---|---|---|---|
| 1 | 과제 B. 발주 단위 통합 | 인력 0.5명 | 수기 발주 대장 관리 중단 |
| 2 | 과제 A. 주요 품목 재입찰 | 외부 자문 ○○원 | 소액 품목 정기 재견적 축소 |
| 3 | 과제 C. 반품·폐기 감축 | 현장 교육 ○○원 | (예산 70% 승인 시 내후년으로 연기) |
(예시)
‘대신 축소·중단하는 것’ 칸은 쓰기 불편하다. 누군가의 일을 줄이는 이야기라 조직 안에서 민감할 수도 있다. 그래도 이 칸이 있어야 결재자는 “이 팀이 뭘 포기하고 이걸 밀겠다는 건지”를 본다. 자원은 늘 한정돼 있고, 새 일에 자원을 쓰면 무언가는 덜 하게 된다. 그걸 숨기지 않는 계획서가 신뢰를 얻는다.
마지막 문장이 핵심이다. 결재자는 어차피 깎는다. 어디를 깎을지 미리 제시한 계획서는 원하는 쪽으로 깎인다. 제시하지 않으면 결재자가 임의로 깎는다.
5. 리스크와 대안 — 안 되면 어떻게 하나
마지막은 리스크다. 대부분의 계획서는 모든 게 계획대로 된다고 가정한다. 결재자는 반대로 생각한다.
“이 계획의 가정 중에 하나가 틀리면?”
첫 페이지에 길게 쓸 필요는 없다. 핵심 가정 1~2개와, 그게 틀렸을 때의 대안 한 줄씩이면 된다.
| 핵심 가정 | 20% 틀리면 | 목표 영향 | 대안 |
|---|---|---|---|
| 내년 물량이 올해 수준 유지 | 물량 20% 감소 | 원가 절감률 5% → 3.8% | 과제 B 범위 축소, 인력 충원 보류 |
| 재입찰 시 단가 5% 인하 가능 | 인하폭 4%에 그침 | 원가 절감률 5% → 4.5% | 계약 기간 연장 조건으로 재협상 |
(예시)
‘목표 영향’ 열은 대략적인 계산이면 충분하다. 핵심은 어떤 가정이 흔들릴 때 계획이 가장 크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위 예시라면 단가보다 물량이 훨씬 민감한 가정이다. 결재자와의 대화도 “리스크가 뭐냐”가 아니라 “물량이 줄면 어떻게 할 거냐”로 구체화된다.
이 표가 있으면 결재자는 안심한다. 계획이 틀릴 수 있다는 걸 아는 팀은, 틀렸을 때 빨리 움직이기 때문이다.
바로 쓰는 사업계획서 1페이지 양식
한 줄 요약과 5가지를 한 장에 담으면 이렇게 된다.
| 구획 | 내용 | 분량 |
|---|---|---|
| ⓪ 한 줄 요약 | “내년엔 ○○를 △에서 □로 만들기 위해 A·B·C를 하고, D는 하지 않는다” | 1줄 |
| ① 올해 진단 | 계획 대비 실적 핵심 2~3줄, 이유, 올해 배운 것 → 내년 반영 | 3줄 |
| ② 내년 목표 | 목표 1~3개, 기준선 → 목표치, 기한 | 3줄 |
| ③ 핵심 과제 | 과제 3개 안팎, 과제별 목표 기여분, 통제 가능성 | 표 1개 |
| ④ 필요 자원 | 우선순위 1·2·3, 과제별 자원, 대신 축소·중단하는 것 | 표 1개 |
| ⑤ 리스크 | 핵심 가정 1~2개, 20% 틀릴 때 목표 영향, 대안 | 표 1개 |
한 장을 넘기지 않는 게 원칙이다. 넘친다면 아직 정리가 안 된 것이다. 세부 자료는 전부 뒷장 첨부로 보낸다.
첫 페이지를 쓰는 3가지 요령
- 결론부터 쓴다. “내년 목표는 ○○이고, 이를 위해 ○○이 필요합니다.” 배경 설명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결론을 먼저 말하고 근거를 아래에 두는 구조를 흔히 피라미드 원칙이라고 부른다.
- 모든 숫자에 기준선을 붙인다. “15% 개선”이 아니라 “18% → 15%”. 기준선이 없는 숫자는 해석이 안 된다.
- 예상 질문 3개를 미리 준비한다. 첫 장 아래나 첨부 첫 장에 “결재자가 물을 가능성이 높은 질문 3개와 준비한 답”을 둔다. 회의 시간이 줄고, 질문이 나와도 당황하지 않는다.
- 형용사를 지운다. “적극적으로”, “획기적으로”, “체계적으로”를 지우고 나서도 문장이 의미가 있으면 남긴다.
체크리스트 — 사업계획서 올리기 전에

| # | 질문 | 통과 기준 |
|---|---|---|
| 0 | 한 줄 요약을 결재자가 자기 말로 다시 말할 수 있나? | 맨 위 한 줄, “하지 않는 것” 포함 |
| 1 | 첫 장이 올해 실적 나열로 시작하지 않나? | 진단(계획 대비 결과와 이유)으로 시작 |
| 2 | 목표가 3개 이하이고, 모두 기준선·목표치·기한이 있나? | 3개 이하, 숫자 3요소 |
| 3 | 과제의 기여분 합이 목표와 맞고, 통제 가능성이 보이나? | 목표 브리지 표 + 통제 가능성 열 |
| 4 | 무엇을 안 하기로 했는지가 보이나? | 자원 표의 ‘대신 축소·중단하는 것’ |
| 5 | 핵심 가정이 틀릴 때 목표가 얼마나 흔들리는지 보이나? | 20% 이탈 시 목표 영향 + 대안 |
| 6 | 트렌드 키워드가 과제 이름이 되지 않았나? | 우리 문제 → 수단 순서 |
자주 묻는 질문
Q. 신규 사업이라 올해 실적이 없으면 1번 진단은 어떻게 쓰나요?
실적 대신 출발점의 상태를 쓴다. 시장 규모, 현재 고객 수, 비교 대상(유사 사업의 첫해 결과)처럼 내년 목표의 기준선이 될 숫자를 둔다. 기준선이 없는 신규 사업 계획은 예산 3편에서 말한 것처럼 ‘무엇을 해서 무엇이 바뀌는지’부터 흐려진다.
Q. 지원부서는 매출 목표가 없는데 목표를 숫자로 어떻게 쓰나요?
결과 하나로 보지 말고 층을 나누면 된다. 품질(기한 준수율, 오류 건수), 마일스톤(완료 시점), 예방(사고·지적 건수), 개선(소요 시간 단축). 관리 업무 성과평가 글에 업무별 예시를 정리해 뒀다.
Q. 회사 양식이 정해져 있어서 1페이지를 따로 못 넣으면요?
양식의 첫 칸, 보통 ‘요약’이나 ‘개요’ 칸에 이 5가지를 압축해서 넣으면 된다. 양식이 무엇이든 결재자가 먼저 읽는 곳은 첫 칸이다.
Q. 목표를 낮게 잡으면 달성은 쉽지 않나요?
쉽다. 그리고 결재자도 안다. 기준선 대비 개선 폭이 너무 작은 목표는 “내년에 하던 일만 하겠다”로 읽힌다. 도전적이되 근거가 있는 숫자, 그 근거가 과제 기여분 표에 보이는 숫자가 가장 설득력 있다.
맺으며 — 사업계획서는 ‘할 일 목록’이 아니라 ‘선택의 기록’이다
좋은 사업계획서는 많은 걸 하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지 고른 결과를 보여준다.
한 줄로 말할 수 있게 정리하고, 올해를 정확히 진단하고, 목표를 몇 개로 좁히고, 과제가 그 목표를 얼마나 만드는지 연결하고, 필요한 자원과 그 대신 멈출 일을 정하고, 틀릴 때를 대비한다. 이 여섯 줄이 첫 장에 있으면, 뒤의 39장은 근거가 된다.
결재자는 첫 페이지에서 판단한다. 그러니 첫 페이지에 판단할 재료를 올려두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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