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이다. 회사마다 내년 사업계획 양식이 내려오고, 팀장 책상 위에는 어김없이 『트렌드 코리아』 신간이 한 권씩 올라온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을 필요는 없다. 소비 트렌드 책이라 마케터에게는 전부 쓸모가 있겠지만, 사업계획서를 써야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그중 일부다.
이 글은 그 일부만 골라낸 기록이다. 10개 키워드는 한 줄씩만 짚고, 내년 계획서에 실제로 옮겨 적을 만한 3개만 깊게 본다. 그리고 하나 더 — “이게 정말 새로운 개념인가?”를 따져본다. 기획자가 트렌드 책을 읽는 방법은 감탄이 아니라 검증이어야 하니까.
10대 키워드, 한 줄씩
트렌드 코리아 2027이 제시한 슬로건은 ‘알파 쉽(ALPHA SHEEP)’, 무리를 따라가는 양이 아니라 먼저 판단하고 움직이는 첫 번째 양이 되자는 뜻이다. 눈에 띄는 점은 키워드 어디에도 ‘AI’가 전면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 저자들은 AI가 이미 스마트폰처럼 당연한 범용재가 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 키워드 | 한 줄 요약 | 기획자 관심도 |
|---|---|---|
| 권태사회 | 자극은 넘치는데 “재미있는 게 없다”는 바쁜 권태 | 낮음 |
| 라이프 ROI | 돈뿐 아니라 시간·관계까지 투자 대비 효과로 따지는 소비자 | 중간 |
| 폼팩터 시프트 | 성능 경쟁이 한계에 오면, 제품의 ‘형태’를 바꿔 수요를 만든다 | 높음 |
| 해봄경제 | 철저한 준비보다 일단 해보고 고쳐가는 실행 중심 경제 | 높음 |
| 저장인류 | 고르고 나서 저장하는 게 아니라, 일단 저장하고 나중에 고르는 사람들 | 낮음 |
| 바이브 워킹 | AI를 많이 쓰는 게 아니라, 사람과 AI가 함께 움직이도록 일 자체를 재설계 | 매우 높음 |
| 리:텐션 전략 | 신규 고객 확보 비용이 올라가자 기존 고객을 지키는 쪽으로 무게중심 이동 | 중간 |
| 휴먼엣지 | AI가 결과물을 쉽게 만들수록 사람의 선택·손길·시간이 차별점이 된다 | 중간 |
| 하프시그널 | 인생 후반전을 맞은 중년 세대가 건강·자기관리 소비의 핵심층으로 | 업종에 따라 |
| 안목자본 | 만드는 능력보다 고르고 버리는 판단력이 경쟁력 | 중간 |

마케팅·영업 쪽이라면 리:텐션 전략과 라이프 ROI도 계획서에 쓸 만하다. 하지만 어느 부서든 공통으로 써야 하는 건 아래 3개다.
먼저 솔직하게: 대부분은 ‘옛날 개념의 새 이름’이다
3개 키워드를 읽으면서 든 첫 생각은 이랬다.
- 바이브 워킹 → 좀 더 똑똑해진 RPA 아닌가?
- 해봄경제 → 린 스타트업의 MVP, 최소한으로 만들고 고객 피드백으로 반복 개선하는 그것 아닌가?
- 폼팩터 시프트 → 트리즈(TRIZ)랑 비슷한 얘기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면, 반은 맞고 반은 다르다. 그리고 다른 그 반이 내년 계획서에 들어가야 할 부분이다. 트렌드 책의 가치는 새 개념을 발명하는 데 있지 않다. 옛 개념이 왜 지금 다시 중요해졌는지, 그 조건의 변화를 짚어주는 데 있다.
1. 바이브 워킹 — “AX 하자”가 아니라 “우리 일을 정의하자”
책이 말하는 것
AI 도입이 곧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AI 도구를 많이 쓰는 게 핵심이 아니라, 사람과 AI가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업무 자체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것.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중요한 건 어떤 AI를 쓰느냐가 아니라 조직 구조를 어떻게 바꾸느냐다.
정말 ‘똑똑한 RPA’일까?
닮은 점부터 보자. 둘 다 사람이 하던 일을 기계에 넘긴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 구분 | RPA | 바이브 워킹 |
|---|---|---|
| 넘기는 일 | 규칙이 정해진 반복 작업 (복사·입력·대사) | 초안·분석·요약 같은 판단이 섞인 작업 |
| 프로세스 | 기존 프로세스를 그대로 두고 손만 자동화 | 프로세스 자체를 다시 짬 |
| 사람의 역할 | 예외 처리 | 어디까지 AI에 맡기고 어디서부터 사람이 판단할지 경계를 정하는 것 |
그래서 “똑똑한 RPA”라는 표현은 절반만 맞다. RPA는 손을 대신했고, 바이브 워킹은 판단의 일부를 나눠 갖는다. 나눠 갖는 순간, 누가 무엇을 책임지는지가 문제가 된다.
진짜 교훈은 RPA 실패에서 나온다
RPA를 도입해 본 조직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엉망인 프로세스를 자동화하면 엉망이 더 빨리 돌아갈 뿐이라는 것. 바이브 워킹도 똑같다. 오히려 판단까지 넘기는 만큼 더 위험하다.
그래서 내년 계획서에 “AX 추진”, “AI 활용률 ○% 달성” 같은 목표를 쓰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 우리 업무를 정의한다 — 우리 팀은 정확히 무엇을 만들어내는가? 산출물 기준으로 업무를 적어본다.
- 프로세스를 정비한다 — 각 업무가 어떤 단계로 흐르는지, 어디서 막히는지 그린다.
- 경계선을 긋는다 — 단계마다 “AI가 한다 / AI 초안 + 사람 검토 / 사람이 판단한다” 셋 중 하나로 표시한다.

AX는 이 세 단계가 끝난 다음에 오는 결과지, 출발점이 아니다. 도구부터 고르는 AX 계획은 대개 “라이선스는 샀는데 아무도 안 쓰는” 결말로 끝난다.
계획서에 옮길 한 줄: “AI 도입” 대신 “핵심 업무 ○개의 프로세스 재정의 및 AI·사람 역할 경계 설정”
2. 해봄경제 — 린 스타트업이 ‘개인’에게 내려왔다
책이 말하는 것
준비보다 실행을 앞세우는 흐름이다. 생성형 AI와 각종 디지털 도구 덕분에, 예전엔 전문가와 조직이 있어야 가능했던 일을 개인이 직접 시도할 수 있게 됐다. 철저히 준비한 뒤 시작하던 시대에서, 일단 해보고 부족한 부분을 고쳐가는 시대로 넘어갔다는 것.
린 스타트업의 MVP와 뭐가 다른가
맞다. 개념의 뼈대는 2010년대 초 유행한 린 스타트업 — 최소 기능 제품(MVP)을 만들고, 고객 반응을 보고, 빠르게 고치는 반복 — 과 거의 같다. 달라진 건 두 가지다.
| 구분 | 린 스타트업 (MVP) | 해봄경제 |
|---|---|---|
| 주체 | 스타트업, 신사업 조직 | 개인, 1인 창업, 조직 안의 실무자 |
| 시도 비용 | 개발자·디자이너·예산이 필요 | AI로 프로토타입을 하루 만에 — 시도 비용이 0에 가까워짐 |
시도 비용이 떨어지면 계산이 바뀐다. 예전에는 “제대로 준비해서 한 번에 성공시키자”가 합리적이었다. 이제는 작게 여러 번 시도하는 쪽이 오히려 싸다.
사업계획에는 이렇게 반영한다
대부분의 사업계획서는 여전히 “큰 과제 3개, 연말 목표치 확정” 구조다. 해봄경제를 반영한다면 구조를 조금 바꿔볼 만하다.
- 확정 과제와 실험 과제를 나눈다 — 예산의 일부를 결과가 불확실한 작은 실험에 배정한다.
- 실험 과제는 목표치 대신 ‘판단 시점’을 적는다 — “3개월 시범 운영 후 지표 ○○로 확대·중단 판단”
- 실패를 비용이 아니라 학습으로 기록하는 칸을 만든다.

단, 하나는 분명히 하자. 해봄경제는 “아무렇게나 일단 저질러라”가 아니다. 작게, 빠르게, 그리고 멈출 기준을 정해두고 해보는 것이다. 결재선에서 실험 예산이 통과되는 것도 멈출 기준이 있을 때다.
계획서에 옮길 한 줄: “신규 과제는 ○개월 시범 운영 + 확대/중단 판단 기준 사전 설정”
3. 폼팩터 시프트 — 성능이 아니라 ‘형태’를 바꾼다
책이 말하는 것
세제의 세척력, TV의 화질처럼 전통적인 성능 개선이 한계에 다다르면, 기업은 제품의 물리적 형태·구조·사용 방식을 바꿔 새 수요를 만든다. 씹어서 쓰는 치약 정, 고체 샴푸, 동전 모양 육수, 붙이는 비타민 패치, 이동형 TV, 거꾸로 세우는 소스 용기 같은 사례가 소개된다.
트리즈와 비슷한가?
방향은 맞다. 트리즈(TRIZ)는 특허 수십만 건을 분석해 발명의 패턴을 40가지 원리로 정리한 문제 해결 방법론이다. 폼팩터 시프트 사례를 트리즈로 보면 꽤 깔끔하게 설명된다.
| 사례 | 트리즈 원리로 보면 |
|---|---|
| 액체 샴푸 → 고체 샴푸 | 물리적 상태 변경 |
| 육수 → 동전 모양 육수 | 분할 (한 번 쓸 만큼 쪼갠다) |
| 먹는 비타민 → 붙이는 패치 | 다른 차원으로 이동 |
| 고정형 TV → 이동형 TV | 동적화 (고정된 것을 움직이게) |
차이는 이것이다. 트리즈는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찾는 방법론이고, 폼팩터 시프트는 ‘바뀐 결과가 시장에서 먹힌다’는 관찰이다. 그러니까 둘은 경쟁 개념이 아니라 앞뒤 관계다. 폼팩터 시프트가 “형태를 바꿔라”라고 말한다면, 트리즈는 “이렇게 바꿔볼 수 있다”는 체크리스트를 준다.

제조업이 아니어도 해당될까
해당된다. 서비스에도 폼팩터가 있다. 서비스가 전달되는 단위, 채널, 시간, 장소가 서비스의 형태다.
- 한 번에 길게 하던 교육 → 10분 단위로 쪼갠 교육 (분할)
- 정해진 장소에서 받던 서비스 → 찾아가는 서비스 (이동)
- 사람이 응대하던 문의 → 셀프 처리 + 예외만 사람 (구조 변경)
내년 계획을 세울 때 “품질을 ○% 높인다”만 적혀 있다면, 한 번쯤 물어볼 만하다. 우리 서비스의 성능 개선은 이미 한계에 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형태를 바꿀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인가?
계획서에 옮길 한 줄: “주요 서비스 ○개에 대해 전달 형태(단위·채널·시간·장소) 변경 가능성 검토”
사업계획서 체크리스트 — 3개 키워드를 한 장으로

| 키워드 | 계획서에 던질 질문 | 통과 기준 |
|---|---|---|
| 바이브 워킹 | AI 도입 전에 우리 업무와 프로세스를 정의했는가? | 업무별 “AI / AI+사람 / 사람” 경계표가 있다 |
| 해봄경제 | 결과가 불확실한 과제에 작은 실험 예산과 멈출 기준이 있는가? | 시범 기간·판단 지표·판단 시점이 적혀 있다 |
| 폼팩터 시프트 | 성능 개선 말고 형태를 바꿀 과제가 하나라도 있는가? | 전달 단위·채널·시간·장소 중 하나를 바꾸는 과제가 있다 |
맺으며 — 새 이름에 속지 말고, 바뀐 조건을 읽자
바이브 워킹은 RPA의 교훈을, 해봄경제는 린 스타트업을, 폼팩터 시프트는 트리즈를 닮았다. 트렌드 키워드 대부분은 옛 개념의 새 이름이다.
그래도 이 책을 내년 계획 시즌에 펼쳐볼 이유는 있다. 새 이름이 붙었다는 건, 그 개념이 다시 통하는 조건이 만들어졌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AI로 시도 비용이 떨어졌고, 판단의 일부를 기계와 나눠 갖게 됐고, 성능 경쟁은 끝나가고 있다.
계획서에 키워드를 그대로 옮겨 적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결재선은 유행어가 아니라 우리 일에 어떻게 적용하는지를 본다. 통과되는 계획서는 늘 그쪽이다.
참고: 키워드 정의는 『트렌드 코리아 2027』(김난도 외, 미래의창) 출간 관련 보도를 바탕으로 정리했으며, 트리즈·RPA·린 스타트업과의 비교는 필자의 해석이다.
참고 자료